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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교수의 평설 육조단경강좌’의 두번 째 강의능가경 수행자와 금강경 수행자의 차이 - 깨달음으로 가는 근본 변화를 보다

부전선원(선원장: 안국스님)은 2020년 5월 28일(목) 19시 30분 선원 내에서 2020년 한국참선불교대학원의 첫 교육과정인 ‘강경구교수의 평설 육조단경강좌’ 의 둘째 주 강의에 들어갔다. 이날 강의에는 수강생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법사는 동의대학교의 강경구교수가 맡아 진행하였다. 이하는 강경구교수의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육조혜능스님에서 광주에서 살면서 스님이 되기 전 저자거리에서 장작을 팔고 다니던 중 안도성이라는 사람이 금강경을 외는 소리를 듣고 금강경이 지향하고 말해주는 바가 무엇인지를 한 순간에 깨닫고 황매현으로 가서 5조홍인스님을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평설 육조단경을 강의하는 강경구교수
강의에 열중하는 수강생들

5조 홍인스님 이전까지는 능가경이 선종의 핵심경전이었으나 홍인스님부터는 금강경을 근본경전으로 하였다고 하였다. 달마대사부터 4권의 능가경을 전법의 증표로 하여 내려왔는데 능가경은 유식 경전으로 어렵고 인도에서 나온 깨달음 법을 총결집한 경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홍인스님이 다소 쉬운 금강경으로 바꿈에 따라 깨달음의 차이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불교에 입문하여 공부하는 것을 보면 열이면 열 모두 ‘못난 나’에서 ‘잘난 나’로 즉, 수행을 통하여 미혹한 ‘나’에서 깨달은 ‘나’로 간다고 그리고 있는데 능가경은 그런 방식이라고 하였다. 능가 5법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본래 완전한 하나의 큰 마당을 줄을 그리고 나누어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므로 편리하지만 부처님 마음이나 몸을 보는 데는 방해가 되고 이름은 모양에 기반하고 있고 또 <모양>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어 모양에 따라 부처님이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다고 <구분(분별)>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구분은 우리를 고해로 끌고 가며 그 고해에서 ‘나’와 ‘너’,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 등으로 나누는 망상이 일어나는데 이를 생멸법이라고 하였다. 이 생멸법을 행법으로 하나하나 버리고 나면 우리에게 <정지(正智)> 바른 지혜가 나온다고 하였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진상을 못 보게 되는데 그 미움을 하나씩 버려나가면 그 사람의 진상을 보게 되듯이 바른 지혜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행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3천배를 하고 나면 나는 3천배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 역시 망상이고 참선을 하고 나서 나는 참선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망상이라며 이런 망상을 내려놓기 위하여 한 3천배 혹은 참선이 오히려 망상을 더욱 키우는데 이용되어 스스로는 비극적인 중생의 자리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망상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쉽고도 어려운 것이 깨달음으로 정지(正智) 바른 지혜란 ‘나’와 ‘너’의 분별을 멈춘 지혜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은(不思善 不思惡)’ 바른 지혜가 나오면 <여여(如如)>하게, 본래 그러하게, 항상 그러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름, 모양, 망상 등의 세상의 생멸법을 순차적으로 지워나가서 바른 지혜와 여여함으로 간다는 그림이 능가경이라고 하였다. 이런 방법은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면서 대승불교는 생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하였다. 능가경은 이런 망상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는 순차적인 수행 형태로 육조혜능스님과 대비되는 신수스님은 능가파라고 하였다.

깨달음은 산속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대승불교라고 하였다. 육조단경을 보면 육조혜능스님이 수행한 것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홍인스님이 석가모니께서 능가경을 설하는 능가변상도와 오조까지의 선종맥을 나타내는 오조혈맥도를 벽에 그리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림이고 모양이며 이것은 버려야 하는 그림이고 모양이라고 하면서 여기에 신수스님이 게송을 적었는데 이 때 홍인스님은 능가변상도를 여기에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데 이것은 능가경을 더 이상 선종의 핵심경전으로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하였다. 금강경은 머물지 않는 것이고 모양을 내려놓는 것이고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였다.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무념을 파도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무념은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시비, 선악, 분별, 취사, 선택을 내려놓고 온 몸으로 만사만물을 유감없이 만나가는 자리로 다시 말하면 역동적으로 지금 오는 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으로 역동적 고요함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보통 지나간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고 하였다. 망상, 번뇌가 일어날 때 망상을 상대하지 않고 거기에 빛을 보내는 것 즉, 거기에 주의력을 보내는 것, 알아차림 하는 것이 무념의 실천이라고 하였다. 부처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도 있다면서 모양 없음에 도달하는 것이 부처를 실천하는 것인데 그것은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닦아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눈 뜨는데 있다고 하면서 나를 허물어서 전체의 법신과 한 몸으로 만나는 자리가 되면 망상이 일어난 그 자리가 부처가 있는 자리라고 강조하였다.

닦아서 성숙한 완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이대로, 탐진치(貪瞋痴) 이대로, 탐진치가 일어나는 자리를 밝게 보는 것을 반복하는 일, 시비와 선악을 내려놓고 가만히 알아차리는 일로 돌아오면 지금 이 자리가 계정혜의 자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육조단경은 지금 당장, 그리고 매번 깨달음을 실천하여야 나중에는 24시간 지속이 된다고 하였다. 지금 찾아온 손님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미혹함을 내려놓아 깨달음에 도달하여야지 하면 깨달음은 저 멀리 3아승지겁으로 멀어진다고 설명하였다.

지금 당장 깨달음을 실천하여야 한다면서 물이 차면 찬 것인 줄 알고 따뜻하면 따뜻한 줄 당장 아는 것처럼 도명(혜명)스님이 ‘불사선불사악 할 바로 그때 당신의 본래면목이 어떤 것이냐.’란 말에 바로 깨침이 온 것처럼 이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생각이라는 장애로 이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고 하였다. 미혹한 자리에서 점차 쌓아나가 완성자가 되겠다는 그림을 내려놓지 않으면 육조스님의 법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수행의 엘리트에게서 증상만이 나타나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최고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육조스님의 법은 최고라는 것을 멈추는 것이 깨침으로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수스님의 게송인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가 생기지 못하게 하리(莫使有塵埃).”는 능가경의 5법 즉, 이름(名), 모양(相), 분별(分別)의 3가지 미혹한 법(迷法)과 정지(正智)와 여여 혹은 진여(眞如)의 2가지 깨닫는 법(悟法)처럼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닦아가는 과정에 기초한 수행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부처와 똑같은 여래장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힘을 쓰지 못하는데 이 여래장을 기르는 일을 해야 하는데 여래장의 32상의 훌륭한 모습이 5음 18계로 꽁꽁 닫쳐 있기 때문이며 이것을 닦아내어 훌륭한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 능가수행의 전법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닦으면 훌륭한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신수스님은 그 당시 교수사로서 홍인스님의 교리를 그대로 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사로서의 그런‘나’가 있었다고 하였다.

신수스님은 이 게송을 짓고 곧바로 홍인스님에 가져가야 하는데 두근거림이 있어 찾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벽에 붙이고 말았는데 그 두근거림이란 깨달음을 홍인스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 ‘잘난 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깨달음이란 그 ‘잘난 나’를 내려놓는 것이므로 ‘잘난 나’, 이만큼 갈고 닦은 ‘나’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였다. 그런 것을 보면 일자무식인 사람이 오히려 ‘나 잘났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를 잘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법에서는 낫다고 하였다.

이게 대하여 돈황본에서는 강주별가인 장일용에게 부탁하여 적게 한 게는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며(菩提本無樹), 명경 또한 대가 아니다(明鏡亦非臺).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佛性常淸淨), 어디에 티끌과 먼지가 있을 것인가(何處有塵埃).” 또 하나의 게는 “마음은 깨달음의 나무요(心是菩提樹), 몸은 명경대라(身爲明鏡臺). 명경은 본래 청정하니(明鏡本淸淨), 어디에 티끌과 먼지로 오염되겠는가(何處染塵埃).”라고 하면서 파초의 바깥은 있는데 안을 뜯어보면 없는 것처럼 진공묘유(眞空妙有)라 깨달음은 따로 있지 않지만 어디에도 존재한다면서 이것이 반야의 지혜라고 하였다. 탐진치 그대로가 부처의 자성인데 어디에 먼지가 따로 있겠는가? 망상을 제거하여 자성을 보는 것은 파도를 재워서 바다를 보는 것처럼 어렵다면서 불성은 본래 청정한데 저 파도 그대로 바다라고 설명하였다. 망심과 진심이 다르지 않다는 진망불이라고 설명하였다. 앞의 게처럼 한번은 부정하면 다음의 게에서 긍정하고 긍정하면 부정하는 것이 중도이며 오는 대로 부정하고 오는 대로 긍정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하면서 부정과 긍정을 동시 실천할 때 중도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유통본인 덕이본에서는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오(菩提本無樹), 명경 또한 대가 아니로다(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티끌과 먼지가 일어나리(何處惹塵埃).”라고 소개하면서 본래 한 물건이 없다가 돈황본에서는 불성이 청정하다로 되어 있는데 이런 불성과 반야, 유식은 있음이고 반야는 없음인데 육조혜능스님에게서는 불성과 반야가 하나로 통합되어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깨달은 ‘나’가 없어야 깨달음이 되는 것이라면서 깨달은 주체로서의 ‘나’가 없는 것이 무아(無我), 깨달은 대상으로서 법이 없는 것이 무법(無法)이라고 하였다.

육조혜능스님이 홍인스님이 설한 내용을 듣고 언하에 깨달아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자성이 본래 생명하지 않은 것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자성이 본래 저절로 구족하여 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자성이 만법을 일으키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란 게송을 합송하고 자성은 스스로 그러한 성품이므로 지금 이 자리에 명명백백하게 들어나 있으니 이것은 자성이고 저것은 아니라는 구분만 내려놓으면 지금 당장 들어난다고 하면서 깨달음은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육조혜능스님의 한결같은 법문이라고 전체적인 설명을 끝내고 나서 수강생들과 서로 문답을 하고 강의를 마무리 하였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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