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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시대, 불교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부산교수불자연합회 회장 동아대학교 장상목 교수는 2020년 1월 14일 화요일 부전선원(선원장:안국스님)이 개설한 참선대학원에서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불교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이하는 강의 내용을 장 교수가 직접 정리한 것이다.

참석대학원 특강 후 장상목교수와 동참한 수강생들

1. 4차 산업혁명의 시대란?

4차 산업혁명은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정확히 정의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바뀌고 모든 것이 변하는 변혁의 시대로 정의를 내렸고, 수강자 대부분이 중장년임을 고려하여, 이러한 미지의 시대에 대하여 하나의 화두로 “초고령화 사회, 백세시대 우리의 밝은 미래를 꿈꿔도 될까요?”를 제시하였다. 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궁즉변 변즉통(窮則變 變則通)”을 인용하면서 변화(change)하면 새로운 기회(chance)가 온다고 우리 모두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고 변화하자고 강조하였다.

원시시대 인간은 오감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나무와 돌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면서 생존하였지만, 현재 인간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시공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받아들이고 커피라는 도구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면서 생존한다. “한손에 스마트폰, 또 다른 한손에 커피”라는 슬로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왜 커피인가? 잠 오는 것을 막고 깨어있기 위해서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세상 모든 정보를 찾아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사유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지고 공유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개되고 공유되는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알고 깨닫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정보의 홍수 속에 정보에 속박당하고 예속되어가는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극복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불교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은 아주 중차대할 것이다.

2. 불교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장 교수는 새로 개설한 본인의 강좌 제목을 소개하면서 제목이 본질을 규정할 수 있으니 제목을 잘 짓는 훈련을 강조하였다. 최근 고등학교에서 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를 배우지 않고 이공계 입학하는 대학생들이 많아서 기초가 부족한 그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법칙 이해 -마음대로 상상하기-”라는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런 강좌는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이유를 물은 즉, 이공계 학생들은 “인문학”이 들어가면 싫어하고 인문사회대 학생들은 “자연법칙”이 들어가면 싫어하는데 학생들이 싫어하는 키워드만 사용하여 강좌명을 정하였기 때문에 강좌가 인기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그 대안을 물으니, 주제와 부제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즉, “마음대로 상상하기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법칙 이해-”으로 강좌명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었다. 조삼모사와 같은데 무엇이 다르냐고 하니, 학생들은 부제보다 주제를 먼저 보고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수강신청 하였다가 마음대로 취소하면 되니 부담 없이 접근할 것이라고 하였다. 학생의 조언에 따라 강좌명을 바꾸고 나니 장 교수 본인이 아주 편하게 강의를 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하였다.

강좌명을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법칙 이해 -마음대로 상상하기-”라고 하면 강의할 때마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법칙이 연계되어져야하니 강의 준비가 너무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강좌명을 “마음대로 상상하기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법칙 이해-”으로 바꾸고 나니 마음대로 강의할 수 있고 그 강의내용이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법칙이 연계되면 좋고 안 되어도 무방하니 강의 준비가 쉽고 편안하였다는 것이다.

제목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장순욱 작가의 “내 인생에 제목 달기 -성공한 사람들은 제목달기에 능하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각자 “초고령화 사회, 백세시대 우리의 밝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본인들의 인생에 제목을 정하고 시간에 따른 목차도 정하여 보기를 권하였다.

3. 알고 깨닫는 것의 의미

‘안다’는 것의 의미와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안다’는 것의 의미를 “요한복음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과 연계하면서 완전히 자유롭게 된 상태가 “天上天下唯我獨尊”이 아닐까하고 반문하였다. 김홍렬씨의 “진리가 너희를 구속하리라 -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라는 패러디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https://brunch.co.kr/@brunchnwkd/330), 마광수 교수의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는 에세이를 읽고 그 지독한 패러독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역사상 진리라고 하는 미명하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마녀사냥 등을 거론하며 우리는 진리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구속되어있는지를, 그리고 그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발상과 상상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 교수는 “내 멋대로 상상하자 -변혁의 시대 생존 전략-”이라는 강좌도 개설하였다고 한다.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 변혁의 급류에 휘말려서 자아를 상실한 시대의 생존 전략은 나를 확립하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개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를 육하원칙에 따라 고찰하였다.

1. Who know? Who recognize? (누가 알고 누가 깨달을 것인가?)
2. When know? When recognize? (언제 알고 언제 깨달을 것인가?)
3. Where know? Where recognize? (어디서 알고 어디서 깨달을 것인가?)
4. What know? What recognize?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5. Why know? Why recognize? (왜 알고 왜 깨달을 것인가?)
6. How know? How recognize?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1. 나를 확립하고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나를 확립하게 되면,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고 (Impossible이 I’m possible), 내 일( my job)이 내일(tomorrow)로 되어 미래의 비전과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체를 두고 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란 무엇일까? 나의 의식을 나라고 하여도 다중인격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억 속의 다양한 나란 존재가 혼재하여 있는 것이다. 전생의 기억까지 확장한다고 하면, 과연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영혼 다시쓰기: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에서 해킹은, 과학자들이 원래는 없던 인간 유형을 만들고 이렇게 사람의 유형이 만들어지면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이 특정한 유형의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이 다시 과학을 정당화하는 것을 '고리효과'(looping effect)라고 명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좌) https://t1.daumcdn.net/news/201703/27/bntnews/20170327190011765vydr.jpg(우) https://news.v.daum.net/v/20051007154208152

2. 시공간 구애 받지 않고 공부하여야한다.

“No where”가 “Now here”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금강경에 “어디에나 이 경이 있으면 온갖 하늘사람․ 세상사람․ 아수라들이 공양을 올리리니, 이곳은 곧 부처님의 탑과 같으므로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돌면서 꽃과 향으로 그 곳에 흩으리라.”라고 하였다.

유마경에 “유마거사의 좁은 방안에 8만 4천 유순인 사자좌 3만 2천 개를 들여 놓아도 일체 방해됨이 없었다. 정직한 마음이 도량이요, 자비한 마음이 도량이요 보리의 마음이 도량이다.”고 하였다.

화엄경에서도 “깨끗한 마음, 일념 정심(一念淨心)하면 도량이다.”고 하였다. 진리가 있고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곳이 도량이지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3. 우리는 문제를 알고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저 언덕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과학의 발전은 문제해결 자체보다 새로운 문제를 형성하는 문제 찾기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불교의 발전도 팔만대장경을 읽고 외우는 것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현실적인 문제를 찾아서 재해석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각자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저 언덕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004년 12월 런던에 모인 영국의 대표적 미술가와 미술사가 500명은 이구동성으로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을 20세기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꼽았다고 한다. ‘샘’은 시중에서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기성 제품(ready-made object)인 남성용 소변기 위에 ‘R. Mutt’라고 사인한 것이다. 작가의 창조적 작업을 중시하는 전통 예술에 대해 전면적 도전을 한 뒤샹은 “작가가 직접 자기 손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중요한 것은 작가가 물체를 선택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주 삼라만상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철학과 사상 종교가 발생하였다.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삼라만상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 부여가 중요한 것이다.

4.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견물생심이라고 하듯이 모든 인식은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 과정의 첫 단계인 관찰은 과학발견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데, 관연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관찰은 감각기관에 의존하고, 인지구조에 의존하고, 이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 속에서 보려고 하는 것만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관찰가능성은 끊임없는 성취물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見物生心, 見性成佛, 觀世音菩薩, 看話禪”이란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 진리 탐구에서도 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가?

같은 물이라는 하나의 객체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를 일수사견(一水四見) 또는 일처사견(一處四見)이라고 한다. 물을 인간은 마시고 씻는 '물'로 인식하고, 물고기는 자기들이 사는 '집'으로 여기며, 하늘의 천인들은 '보석'으로 생각하고, 지옥 아귀들은 '피고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을 인식하는 것은 주관적 인식이지 절대 객관적 인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밤하늘 별 중에 10만 년 전, 100만 년 전 이미 사라진 별들도 있다. 무수히 많은 다른 시간의 사건들이 지금 이 순간 에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이 밤하늘의 모습이다. 그건 서로 다른 과거의 영상이고 잔영이지 현재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 눈의 문제, 관측기술의 문제가 아닌 우주의 기본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재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고 운명을 판단하기도 한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와 같이 현상이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이게 자세히 보고 오래보아야 본질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래보고 자세히 보지만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발상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세존께서도 네 곳의 성문 밖에서 늙은이와 병든 사람, 죽은 자와 사문을 보고 모든 중생을 건져낼 진리가 무엇인가 생각하시고 출가를 결심하여 수행을 하여 일체 진리를 깨치게 된다.

우리들도 일상에 부딪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본질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훈련을 하여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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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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