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리와수행 참선명상
고통은 생각에서 나온다괴로우면 3분 동안이라도 생각이 없는 자리로 들어가라

봉녕사 승가대학에서 묘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강원을 졸업한 후 선방과 미얀마에서 명상을 수행하였으며 현재 북인도 다람살라에서 제17대 까르마빠 존자에게 귀의하고 까르마빠 존자님의 통역과 번역 등을 하고 있는 정공스님은 2019년 11월 19일(화) 부전선원에서 한국참선불교대학원 수강생들에게 ‘불교의 원리’란 주제로 법문을 하였다. 이하는 이날 행한 정공스님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참선불교대학원에서 수강생들과 자리를 함께한 정공스님

정공스님은 ‘지금이 가을인가’ 혹은 ‘겨울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가을이라고 대답한 수강생에게 그 이유를 또 겨울이라고 대답한 수강생에게도 그 이유를 물었다. 가을이라고 하는 것 혹은 겨울이라고 하는 것은 말, 언어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면서 정확하게 ‘이것이 가을이다.’ 혹은 ‘이것이 겨울이다.’라는 실체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만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가을이다 겨울이라고 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즉, 겨울은 겨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겨울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탁자에 있는 사과를 들고 이것을 무엇이냐고 하니 모두 사과라고 수강생이 대답하였는데 그 사과 맛을 설명하라고 하였다. 사과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을 하여 주어도 모른다고 대답하였는데 그것이 정답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과 맛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냥 물체일 뿐이고 사과는 그 이름이 사과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름이 사과일 뿐인데 우리는 사과라고 알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기에 말, 언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에 있는 사과를 생각할 때 어린 사과나무에서 열린 사과와 지금 여기에 있는 사과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것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면서 이렇게 변화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상(無常) 즉, 항상 함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하기 위하여 즉,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기 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종교를 이것을 위한 것이지만 불교 이외의 종교는 믿기기 하면 되지만 불교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깨달음을 지혜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반야라고 한다고 하였다. 반야가 되면 고통을 벗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라고 할 때 무엇을 나라고 하는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과연 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니 수강생들의 답변은 각각이었다. 일반적으로 나라고 할 때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한다며 불교에서는 몸은 물질이니 색온(色蘊), 마음은 4가지로 나누어서 수상행식(受想行識) 등의 4온으로 하여 이를 합쳐서 오온이라고 설명하였다.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가 공함을 비추어보고 온갖 괴로움을 벗어나리라.’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이 불교의 원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세상살이에서 고통은 없다고 하였다.

먼저 색온은 물질이며 이를 직접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몸이 맨 처음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엄마 몸속에 있었고 엄마 몸속에 있을 때에는 엄마의 몸이었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그 애기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은 내 몸이지만 다르다고 하면서 색온 즉, 몸은 계속 바뀌고 있어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거나 변하지 않은 적은 없는데도 우리는 그냥 내 몸으로 집착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내 몸은 어느 때의 내 몸이 진짜라고 지정할 수도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으로 두리뭉실하게 내 몸으로 보는 것뿐이라고 설명하였다. 변하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라고 하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없는 것이고 실체가 없는 이것을 다른 말로 공(空), 공성(空性)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공, 공성도 역시 실체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에 불과한 것이므로 사과의 맛을 실제로 맛보아야 알 수 있듯이 공, 공성도 체험을 통하여 알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물질의 최소단위가 과거에는 원자라고 하였지만 지금의 양자역학에서는 원자도 쪼개서 들어가면 물질이 아닌 웨이브(에너지장)라고 하면서 물질이란 것도 역시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수온은 느낌인데 지각작용으로 다리가 저리다, 따뜻하다 차갑다 등의 느낌은 영원한 것인가 변하는 것인가를 손을 펴고 손바닥을 느끼게 한 후 다시 손바닥을 합장하게 하여 느낌을 관찰하게 하였다. 그 느낌은 과연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인지 변하는 것을 알게 하여 그 느낌이 역시 항상 함이 없음이 알도록 유도하였다.

상온은 생각으로 지금 이것을 사과로 알고 있는 것은 과거에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생각으로 상온이라고 하였다. 이 상온이란 분명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다르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행온은 의지작용으로 이런 것을 포함한 모든 심리적인 작용을 말한다면서 그 행온도 역시 항상 바뀌고 있다고 하였다.

식온은 분별작용을 말하며 어릴 때의 나는 장난감을 좋아하였지만 지금의 나는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들면서 어릴 때의 나의 식온과 지금은 식온은 바뀌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즉, 계속 바뀌고 있어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면 일체의 고통을 벗어난다고 다시 강조하였다.

휴식이 이어진 법문에서 정공스님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부처님이 과거 인욕선인 시절에 가리왕에게 몸이 갈기갈기 베이고 끊겨 나가면서도 성냄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를 인용하였다. 사실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면 화가 나지만 땅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누가 당겨 가져간다면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고 설명하였다. 부처님은 인욕선인이었을 때 몸을 잘리는 일을 당하였을 때도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상(나라는 생각), 인상(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상(나는 이런 중생이라는 생각), 수자상(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 등 4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경전을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두 글자로 하면 결국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부처님이 인욕선인이었을 때 이런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성냄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정공스님은 이런 생각이 없는 자리를 체험하자고 하면서 3분간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아무 생각이 없는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 들어가도록 참선을 유도하였다. 언어가 없는 자리, 생각이 없는 자리가 마음자리라고 하면서 생각이 붙는 순간, 언어가 붙는 순간이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고 설명하였다. 언어는 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사과라는 말이 사과 자체를 설명할 수 없고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홍길동이란 사람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내가 무엇인가는 바로 생각이 없는 자리, 언어가 붙지 않은 자리가 바로 ‘나’라고 하였다. 그 ‘나’라는 것은 아는 성질을 말한다고 하면서 경험이나 좋다 싫다 분별을 내는 것은 언어가 들어가 계속 바뀌지만 아는 성질은 항상 변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어가 없으면 생각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언어가 없는 자리, 생각이 없는 자리, 알고 있는 자리는 변함이 있는데 그것을 무자성이라고 하고 영원한 ‘나’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깨치면 불(佛,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된다고 하였다. 이 알고 있는 자리를 옛날 조사스님은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 표현하였다고 하였다. 이 아는 성질은 태어난 적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더해지지도 않고 덜해지지도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을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마음도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 아는 성질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똑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아는 성질은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느껴버리면 즉, 깨달아버리면 부처인데 거기에다 이것저것 같다 붙이면 십만팔천리 멀어진다고 하였다.

여기 와서 법문을 들으면 한 가지라도 얻어가야 하는데 그 한 가지는 우리가 말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다 이름뿐이라는 것,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나’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결국 ‘나’도 이름일 뿐이고 ‘나’의 생각도 이름일 뿐이고 내 마음도 이름일 뿐이고 내 몸도 이름일 뿐이며 참선도 이름일 뿐이라고 하였다. 참선이란 생각이 없는 자리에서 아는 성질을 그대로 느끼고 보고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다. 범부도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다. 여래는 여래가 아니라 그 이름이 여래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등등’이 있는데 그것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으면 보살이라고 하였다. 인욕선인은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찍힐 때에도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고 상대에 대하여 연민심을 가지고 제도하려는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머무르지 말고 하라. 보시를 할 때에도 보시를 한다는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하라. 수행을 할 때에도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하라. 일체에 머무르지 말고 하라.’고 가르친다고 설명하였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이것은 생각이 없는 그 자리에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옆의 사람이 아프면 주물러 주는 등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부처의 삶이고 보살의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모든 고통은 생각에서 나온다며 만일 괴롭다면 그것은 이름뿐인 생각이라고 알게 되면 사라진다고 하였다. 생각으로 원망 분노하고 갈등이 생긴다고 하였다. 생각이 없으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생각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일 뿐이므로 생각이 없는 그 자리를 아까 하였던 것처럼 3분씩만 경험하라고 하면서 법문을 마무리하였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저작권자 © e불교중흥,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태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