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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이타심은 수행의 기초가 된다

경북 영주의 대승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원인선사는 2019년 10월 15일(화) 부전선원(선원장: 안국스님)이 운영하는 한국참선불교대학원의 수강생들에게 ‘생활 속의 선’을 주제로 법문을 하였다. 이하는 이날 행한 원인스님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참선불교대학원에서 원인스님과 동참한 수강생들

원인스님은 법문에 앞서 '늦가을 숲길에서'라는 서시를 소개하였다.

(서시) 늦가을 숲길에서

해빛이 따사로운 어느 날 오후, 고요한 숲길로 걸어간다.
나뭇잎 떨어져 대지로 가도, 산은 본래 움직임 없고 참모습 그대로 드러났구나.
나는 오늘 여기에서, 비움으로 충만해 지는 걸 늦가을 산에서 바라보았다.
아낌없이 비우는 곳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것 그것이 삶의 주인이다.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 우리 모두 나아가야 할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1, 물질적 가치의 삶에서 정신적 가치의 삶으로

원인스님은 법문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물질을 추구한다고 하며 물질을 절반만 추구하면 좋은데 심지어는 100%를 추구하여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자의 경우에는 물질이 10% 이내로 줄어든다고 하였다. 물질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정신은 황폐화 된다고 하였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물질이 풍부해진 지금 오히려 물질을 더욱 추구하게 되었다면 과거 40년 전에는 비록 못살았지만 인정이 있는 세상이었다고 현재와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물질을 추구하고 나면 그 다음은 명예를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돈으로 그 명예를 사기도 하고 그렇게 명예를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과대망상에 빠진다고 하면서 명예의 위험성을 강조하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추구하는 욕망의 세계는 끝이 없어 그렇게 욕망만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혼돈에 빠져 있다가 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진단하였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 소득이 3만 달라가 넘는 10등안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이 되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정신세계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정신세계를 추구하면 물질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편안과 행복이 있다며 물질을 통하여 정신세계에 힘을 쏟게 되면 우리의 삶은 더욱 좋아지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불교는 처음부터 마음을 밝히는 것, 닦는 것을 중요시 하여 왔다고 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닦고 깨달아서 생사를 초월하는 절대의 경지의 행복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하였다.

세속적인 학문이란 거의 물질에 기초를 두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이론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결국 이원론 즉, 선과 악, 가는 것과 오는 것,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등 두가지를 가지고 보는 것이며 이런 이원론적 사고로는 물질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것은 이원론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 즉, 안이비설신의 등 육근으로 감지되고 있는 현상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마음을 돌이켜보면 마음의 근본자리는 일체를 초월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이므로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궁중 생활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6년 고행을 하여 깨달은 내용이란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영원하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그때까지 알고 있던 이원론적인 가치관 즉, 선과 악, 생과 사 등이 허깨비로 실제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원각경의 ‘모든 환(幻)을 환(幻)으로 바로 볼 때 그 환이 실재(實在) 하지 않음을 본다.’는 말을 인용하여 환으로 보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예로 어둠을 어둠으로 바로 보지 못할 때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면서 환이란 어둠에 해당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 환(幻)에 속아서 살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또 어둠을 어둠이라고 바로 볼 때 그 어둠은 본래 없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면서 어둠은 중생의 미혹, 환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청정한 본래면목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미혹이 있고 환이 있다고 하였다.

불자들이 현실세계의 현상을 미혹된 마음으로 볼 때는 환이지만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이치에 계합하여 현상을 본다면 그 현상을 실재(實在)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실재한다는 것은 영원하다 또 영원하지 하지 않다고 대립된 분별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영원함’으로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 즉, ‘모든 법은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설명하였다. 일체의 법을 실상으로 볼 때 즉, 있는 그대로 볼 때 우리는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인 삼법인(三法印)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실상(諸法實相)과는 언뜻 보기에 상충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중생의 견해에서는 제법무아이고 성인의 경계에서는 제법실상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무아이기 때문에 무아의 바탕에서 현상을 보면 있는 그대로가 실상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예로 선사들이 번뇌를 돌이키면 번뇌가 곧 보리이고 일체의 부처, 중생, 마음 차별이 없다는 즉심즉불(卽心卽佛) - 마음이 곧 부처 –라는 도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성인의 경계에서 보면 보고 듣는 이 일체가 진리가 아님이 없다고 하면서 거짓을 떠나서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바로 보면 그것이 진리라고 다시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지혜가 없이 보면 진리를 말해줘도 진리가 아니라 망상이 된다고 하였다. 진리이냐 망상이냐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다르지 진리란 구래부동(舊來不動) -엣부터 움직인 바 - 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2. 생활선은 염불 혹은 화두로

그래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법에 따라 실상에 입각하여 현실을 살아간다면 어떤 현실에서도 혼란이 생기지 않고 또 언제나 지혜로 입각하여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반야에 의한 삶 혹은 선(禪)에 의한 삶이라고 하였다. 반야와 선은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서산대사가 ‘선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라고 하였는데 만일 부처님의 마음이 선이라면 일체가 다 선이고 일체가 다 부처의 마음이므로 우리는 이런 진짜 선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해할 때 물질세계에 살면서 정신세계의 삶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중생들은 생사윤회라고 하는 착각, 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늘 윤회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일심으로 마음을 닦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은 닦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지만 미혹에 빠져 있으므로 미혹을 제거하는 데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미혹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미혹을 고집하고 있으므로 미혹을 제거하는 수행에는 교학보다는 선(禪)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선은 현실을 그대로 진리로 바꾸는 이사무애(理事無礙)라고 설명하였다.

선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은 안락하게 살며 더 이상 혼란하지 않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선적(禪的)으로 사는 것이냐는 일심으로 염불 혹은 화두를 들고 살면 된다고 강조하였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집착하지 않은 다소 초연한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집착심을 줄이기 위해서는 있는 현상을 초월적으로 바라 보는 눈이 가져야 한다. 이런 눈을 가지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고 허망하다. 즉, 거짓이다.’라는 인식이 바로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인식이 되지 않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는데 이것이 기본이라고 하였다. 이런 인식을 억지로라도 할 수 있도록 부처님은 계율을 제정하였다고 하였다. 계율을 통하여 선정이 나오고 선정에서 지혜가 나오며 지혜는 해탈이며 완전한 지혜는 정각인데 이런 지혜를 이루려면 일상적인 삶에서 선적(禪的)인 생활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 선적인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거짓된 삶에서 진실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미혹으로 즐길 수 없다며 설사 미혹 가운데 어떤 행복이 있어도 그것은 불안한 것이라면서 돈이 많아 행복이라고 하여도 조금 지나면 돈이 불행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하였다.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고 동일한 면이라면서 사람은 행복을 떠나서 불행이 오고 불행을 떠나서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는데 행복과 불행은 동시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행복을 느끼는 자체가 번뇌라고 하면서 행복과 불행을 초월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이라고 하였다. 번뇌 망상에서의 행복은 도착된, 전도된 행복으로 불행도 같이 있다면서 불행인데 행복으로 느끼기도 하고 행복인데 불행으로 느낀다고 하면서 그것은 생각의 차이일 뿐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 불자는 현실적인 행복에서 벗어난 진정한 행복을 느껴야 한다면서 그것은 선이라고 강조하고 선은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시작하여 열반할 때까지 한결같은 선, 행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태어나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법을 설하고 열반에 드는 모습까지를 변화하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것은 한결같음이라 여시(如是)라고 설명하였다. 중생은 태어남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지만 이 생사는 본질에서는 청정법신이라 변화는 없다고 하였다. 변화란 미혹한 중생의 견지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부처님의 경지에서는 변화는 없고 영원성으로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 이치를 깨달으면 이 자리에서 바로 무심(無心)에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이 무심 즉, 없다는 마음이 바로 불심이라고 하였다. 불심을 바로 깨우치면 그 자리에 생사 없음을 알게 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좋고 나쁨에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전생부터 선근이 쌓인 근기 있는 사람과 지금 막 하려는 초심자와는 차이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는 차근차근 한발 한발 선에 올라서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3. 생활선 실천은 이타심으로, 이타심은 만물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여기에는 3종류의 사람 즉, 이기적인 사람(하근기), 이타적인 사람(상근기), 선과 악이 혼재한 사람(중근기) 등이 있다고 하였다. 이기적인 사람은 하근기에 해당하며 세상 사람은 거의 이기적이라고 하고 여기에도 3중하 즉, 아주 심하게 경우도 없는 사람, 눈치껏 경우를 보는 사람, 양심에 바탕두고 선하게 살아보려는 사람 등이 있다고 하였다. 이기심이 심하면 수행이 어려운데 그것은 이 몸에 끄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수행에서는 이 이기심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기적인 마음은 모든 장애를 일으키고 특히, 세속적인 생활의 욕망에 갇히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이런 사람이 발심하여 마음을 열고 정신세계로 들어간다면 선근을 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발심한 사람이 첫 번째로 행동하여야 것을 이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런 사람은 하근기에서 중근기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타적인 행위는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이며 바로 6가지 바라밀을 행하는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타적인 사람은 정신적인 세계의 바탕에 들어가고 더욱더 수행 즉, 선악을 초월하는 무주, 무념, 무상의 행을 하면 불심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타적인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진정으로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고 하였다. 만물동근(萬物同根) 즉, ‘만물의 근본은 같다.’는 이유를 법구경의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만 가지 현상의 근본은 마음이고 부처 마음과 나의 마음, 만물의 마음이 따로 있지 않고 같다고 하였다.

혹시 내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른데 어떻게 같으냐고 의심하는 것은 바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본래의 마음은 결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마음은 사람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탁자, 식물 등 모든 것 즉, 일체법이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인데 그것은 화엄경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또 ‘한 터럭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다 들어가고 한 터럭 속에서 삼천대천세계가 나온다.’, 그리고 법성계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하나의 티끌이 시방의 세계를 품고 있다 -’은 공간을 초월하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하나의 생각이 바로 무량한 겁이다 -’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라고 예를 들었다.

그러므로 마음은 오묘하고 이 마음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알기에 만물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은 같다고 해서 두리뭉실하게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면서 마음이 같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같은 것이고 만일 초월하지 못하면 각각 별개가 되고 별개가 되면 생사(나고 죽음)가 되는 것이므로 이 기본적 원리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 불자들은 ‘만물의 뿌리가 하나이고 만법의 근본이 마음이다.’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깨우쳐야 저절로 이타적인 마음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몸 안의 세포는 100조라고 하지만 화엄경에서는 불가사의라고 하고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만물의 수와 내 몸 안에 있는 세포수가 같은데 그것은 만물의 뿌리가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내 몸은 만물이 살고 있는 우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내 몸에서 머리는 좋고 다리는 싫다 라든지 왼쪽 팔은 나쁘고 오른 쪽은 좋다 라든지 구별할 수 없는 한 몸이기에 다 소중한 것이라고 하였다.

중생의 이타적인 마음이란 온 우주법계를 나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이 잘 되는 것은 내가 잘 되는 것이고 내가 잘못되는 것은 남이 잘못된다는 것과 같으므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기에 중생을 향한 시기와 질투, 온갖 번뇌 망상은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향한 시비, 분별, 투쟁, 싸움 등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며 이런 것은 모두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것은 만물이 일체라는 불교적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 불자들은 이런 정신세계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인연을 지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실제로 행동을 못하더라도 생각만이라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마음은 뿌리라서 남과 나가 나누어 질 수 없다고 하면서 만일 나누어지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생사심이라고 하였다. 만물은 하나의 뿌리이므로 진리는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불자는 생사가 본래 존재하지 않은 마음을 안다면 또 이런 마음에 의지하여 생활을 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이기심과 잘못된 것이 생길 수가 없다며 이런 바탕에서 실행하는 것이 생활선이라고 강조하였다.

4. 생활선은 생활자체를 선으로 것인데 그것은 자기를 잘 다스리는 것이다

사회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이것은 성주괴공의 이치라고 하면서 부처님의 법도 성할 때도 있고 쇠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라 중생들의 마음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때 선으로 생활하라는 말은 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것이고 생활자체가 그대로 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과 생활을 따로 하거나 선과 생활을 혼합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활자체가 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법성계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에서 초발심이 그대로 정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면서 초발심이 정각이란 진정한 생활선을 말한다고 하였다. 초심은 지금 발심하여 살아가는 마음인데 깨달은 마음과 같다는 것은 생활을 떠나서 정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처음 발심한 마음이니 초발심은 현실이고 현실 그대롤 깨달으면 정각이므로 초심과 정각은 둘로 나누어질 수 없다고 하였다. 초심은 미혹이 있는 상태이고 정각은 미혹이 없는 상태인데 이를 같다고 하는 것은 미혹이 있다 없다는 것은 중생의 경계이지만 본질에서 보면 처음의 마음과 깨친 마음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생활선이고 생활선 그대로가 깨침의 경지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일체가 그대로 선이 될 때 초발심이 되고 변정각이 된다고 하였다.

생활 속에서 선을 실현하는데 낮은 단계와 구경의 단계가 있는데 낮은 단계에 있는 우리들은 이 기본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기본은 첫째 ‘만법은 뿌리가 같다.’라는 것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분별심이 제어가 되며 설사 일시적으로 분별심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점차 제어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이해하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 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붙들고 있으면 소지장(所池障)으로 아는 것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수행을 하려면 ‘좋다 나쁘다 이렇게 해야 된다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생각까지 다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만물은 하나다.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니 일심이 다심이고 다심이 일심이다 시간과 공간은 중생의 분별심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마음에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러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라고 하면서 자타일심(自他一心)으로 마음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으니 이 일심을 가지고 생활을 한다면 무지막지한 이기적인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고 최소한도로 악도에는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불자는 어느 것이든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차별이 없으니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생활선의 기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처음 다섯 비구를 제도하고 조용한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동산에 와서 놀다가 훔쳐 달아난 여인을 찾던 중 부처님을 발견하고 여인의 행방을 묻자 부처님이 대답하길 도망간 여인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유익한 것인가 묻고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자 인간의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4성제법문을 젊은이들에게 잘 알아들 수 있도록 설하였다면서 이처럼 부처님은 그때그때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 ‘바라문이 부처님에 대하여 무슨 능력이 있는가에 질문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농부는 물길을 잘 내고 목수는 나무를 잘 다루며 도공은 토기를 잘 만들지만 성자자는 자기를 잘 다룬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생활선의 본질은 자기를 잘 다루는 현자가 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마음을 잘 다스려서 성자가 되고 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는 침체기에 있다고 진단하고 불교의 이론을 생활 속에서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그 이론을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활용하여야 하는데 주변 사람을 보는데 활용하고 있다고 하면서 남의 허물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나를 알면 자신이 열심히 살게 되어 그 자체로 남을 교화시키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남의 허물을 보는 사람은 결코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비난만 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5. 생활선의 5가지 공덕

생활선을 실천하면 5가지 공덕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는 선과 악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은 부동심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좋고 나쁨이 같다면 예를 들어 자녀가 대학교 시험에 떨어진 것이 공덕이 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대신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준 것이고 다른 곳에서 받아야 할 업장이 소멸된다고 설명하였다. 인연따라 시험에 합격된 것이므로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둘째는 ‘이해득실에 차별이 없으므로 마음의 평화가 있다.’며 불안은 마음에 욕심이 있을 때 생긴다고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인간 같은 사람이 거의 없다며 인간성이 아주 나쁘다고 하였다.

셋째 ‘삶에 끌려가지 않고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공덕이다.’며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 모두가 나아가야 하는 삶이라고 하고 우리 모두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음에 의지하지 않고 경계에 끄달리면 주인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고 하면서 임제스님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 어느 곳 어제든지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된다 -’ 을 인용하였다.

넷째 ‘생활선에 의해 살아가면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 다섯째 ‘열반의 평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체험한다.’로 세속의 행복은 그것 자체가 불행이지만 열반의 평화는 진실한 행복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생활선을 하면서 선지식을 찾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수행에는 통상은 스승의 인연, 도반의 인연, 처소의 인연 3가지가 맞아야 한다고 하지만 선의 입장에서는 이 3가지를 마음속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평화로운 곳이 도량이고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나의 스승이고 마음에 혼란이 없는 것이 나의 도반이므로 이 마음속에서 스승, 도반, 처소를 다 찾을 수 있어 결코 외롭지 않다고 하였다. 도량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요즘에는 오히려 잘못된 선지식 때문에 수행에 피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오늘 배운 생활선을 바탕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또 불교 가르침은 8만4천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 하나뿐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닦을 것인가 하는 것은 생활에서 한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법문을 마쳤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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