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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란 마음의 업을 철저히 알고 그것을 비워가는 과정이다어느 한 법을 옳다고 고집하면 그것보다 좋은 다른 법은 사라져 버린다

서암큰스님 문도회장, 문경 선센터 프로그램운영 수석연구위원이며 봉암사 선방에 주석하고 있는 혜우스님은 2019년 9월 24일(화) 부전선원에서 한국참선불교대학원 수강생들에게 ‘참선수행과 금강경’이란 주제로 법문을 하였다. 이하는 이날 행한 혜우스님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참선대학원에서 법문이 끝난 후 혜우스님과 동참한 수강생들

마음공부란 항상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을 놓치지 않고 깨어 있으려고 애를 쓰면서 어디에 마음이 걸렸는지 어떻게 걸렸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에 무엇인가가 걸리면 괴롭고 힘들게 되므로 그것을 알아 괴롭게 힘든 마음을 다스려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로 2분법적으로 나누어 본다고 하면서 중생의 세계는 무명의 세계, 욕망과 집착의 세계, 그래서 생사 윤회하는 고통의 세계, 번뇌와 미혹, 오욕락과 탐진치가 계속 되풀이 되는 세계인데 반하여 부처님의 세계는 불보살의 세계, 생사윤회를 벗어난 해탈과 열반의 세계, 번뇌와 미혹을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 오욕락과 탐진치를 벗어난 공의 세계라고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뇌와 미혹에 쌓여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는 고통이 있는 이런 중생의 세계를 벗어나서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해탈 열반하는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수행으로 마음을 깨달으면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얘기하는데 즉, 마음을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하였는데 혜오스님 자신이 경험한 바로는 돈오돈수가 가능하려면 마음의 업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음의 업이 없다는 것은 ‘아는 즉시 행동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일치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예로 색심에 업이 없다면 색의 경계는 일시적인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고 알게 되면 어떤 경계 즉, 예쁜 이성을 보더라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어떤 이성을 보더라도 무심해져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즉, 색심에 업이 있으면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를 하여도 실제로 예쁜 이성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런 마음을 쉽게 다스려나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돈오돈수는 오욕락에 대한 마음의 업이 없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 즉, 실제의 경계에서도 아는 즉시, 무심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음의 업을 쉽게 다스릴 수 없어 고통을 받으면서 시간 따라 상황 따라 변해가는 무상한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고 하면서 혜오스님 자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점오점수(漸悟漸修)에 해당한다고 역설하였다. 즉, 우리는 아는 만큼 즉, 깨달은 만큼 조금 조금씩 노력을 통하여 나아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이것도 쉽지가 않다고 하였다. 중생들은 마음의 업이 있어 잘못된 것을 알더라도 그것을 쉽게 바꿀 수 없으므로 조금 조금씩 그 마음을 비우는 일, 즉, ‘이것이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마음을 비우려는 노력을 계속 하여야만 욕심, 욕망,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현실적인 욕망, 마음의 업과 끊임없는 전쟁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편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업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고 하면서 이런 마음의 업과 끊임없는 전쟁하면서 그 비우려는 노력을 통하여 점차 나아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음의 업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내 마음의 업이 무엇인지 자신한테 어떤 욕심이 많이 있고 크게 작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음의 업은 그 오랜 세월동안 한 층 한 층 마음에 퇴적암처럼 쌓여 있다면서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쁜 일과 슬픈 일 등이 하나하나 쌓여 마음에 걸리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고 흘러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람 각자 마음의 업으로 남는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마음의 업은 알고 깨달아서 비우지 않는 한 계속 남아 있어 어떤 계기가 되면 나타난다고 하였다.

사람의 욕심은 오욕락 즉, 물욕, 색욕과 식욕, 수면욕, 권력욕, 명예욕 등이라고 하면서, 색욕과 식욕은 동일한 것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근본적인 욕망이고 물욕은 좋은 것을 많이 가지려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며, 수면욕은 단순히 많이 자고 싶다는 욕망만이 아니라 ‘마음에 잠을 잔다.’ 즉, 편안하고 게으른 마음. 고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 안주하고 싶은 마음, 좋다고 하더라도 힘들고 어려우면 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서 수행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하였다. 권력욕은 사람을 부리고 싶어서 힘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내면에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명예욕은 좋은 소리 듣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남으로부터 욕을 먹으면 괴로워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욕심도 사람마다 달라 물욕이 강히여 어떤 욕을 먹어도 끄떡 없이 이익만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 있고 명예욕을 우선시 하여 비난 받으면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 등 천차만별이라고 하였다.

수행을 하면 욕심에 대하여 무심하게 되어 팔풍부동(八風不動)하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팔풍부동이란 이익과 손실(利衰), 훼방과 명예(毁譽,) 칭찬과 비난(稱譏),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등 이런 8가지 경계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고 살면서 편안하게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므로 사람은 원하는 것 얻지 못하고 인고의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이 미련으로 남아 이것이 마음의 업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 마음의 업은 다른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 예로 어느 스님이 사찰의 최고 지위에 있어 남이 보면 누릴 것 다 누렸다고 생각되는데도 다른 권력이 있는 자리에 결국 응한 것은 권력욕이라는 마음의 업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람은 마음의 업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욕심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뉴스에 보도된 것처럼 색심이란 마음의 업때문에 명예를 다 잃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고 예시하였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비난만하지 말고 마음의 업이라는 면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알면 좋으나 일이 벌어졌을 때라도 자신의 마음의 업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일을 당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있는 마음의 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이런 일을 당해서 보니 ‘아하’ 이런 업이 나한테 있구나하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렇게 알게 되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고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고 하면서 그런 고마움을 가지고 지금 발생된 일은 ‘내 마음의 이런 업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마음의 업을 깨달아 그 업을 조금씩 비워나가는 것이 수행이며 그렇게 하여야만 그 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마음수행이란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내 마음의 업을 깨닫고 이해하고 그렇게 받아드려서 비워나가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주변 사람이나 상황을 원망하고 미워하여 더욱 그 업을 쌓아 가는데 이것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설명하였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여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쪽만 보게 되고 싫으면 싫은 쪽만 보게 되어 치우친 마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현실을 점차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어 어떤 사람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중도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금강경의 체험담을 소개하였다.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즉,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에서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아 의심이 생겼다고 하였다. 선방에서 어떤 스님이 3년 결사를 주도하여 이에 찬동하는 스님들이 있었고 정작 주지스님은 절의 형편상 여건이 곤란하여 반대하였는데 양측의 의견이 너무 달라 크게 싸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였다. 3년 결사를 주도한 스님은 계속 대중을 선동하였는데 이런 선동은 대중화합을 깨뜨리는 바라이죄에 해당하고 이런 바라이죄에 해당되는 스님은 강제적으로 사문 밖으로 쫓아낸다고 하였다. 그때 주지스님은 선동 스님의 문중 대표에게 그 스님을 설득하도록 부탁하여 그 스님을 사문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는 절 내부의 일을 자체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을 빌려 처리한 주지스님의 처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후에 그 당시 강제적으로 선동 스님을 사문 밖으로 쫓아낼 것에 대비하여 그 스님을 찬동하는 스님들이 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애기를 들었다며 그래서 그 때 주지스님이 조용하게 해결한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다가 어느 순간 저절로 깨면서 평소 의심을 갖고 있던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과 이 사건이 매칭이 되었다고 하면서 과거에 이렇게 했다 이렇게 하는 방법이 가장 옳은 방법이다라고 생각하였던 자체가 큰 문제이고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것이 바로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과거의 방법을 현재에도 고집하게 되면 현재의 옳은 방법이 설 자리가 없으므로 어느 한 방법을 옳다고 주장하면 다른 방법은 들어올 수 없다며 과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수행하거나 일상생활, 사업을 하는 경우에도 변함없이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고집을 부리면 현재 이 순간 꼭 필요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고 하면서 또 이렇게 고집하여 놓치는 것이 어리석음이니 특히 사업의 경우는 하나를 고집하여 시대적 흐름을 놓치게 되면 망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옛날에 이랬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하나의 마음을 고집하지 말고 현재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며 항상 현재 상황에서 판단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금강경에는 같은 의미가 수없이 반복된다고 하면서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여래설 32상 즉시비상 시명32상(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은 ‘눈에 보이는 세계 혹은 상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것이니 거기에 걸리지 말라.’는 의미라고 설명하였다.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佛設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여래설제1바라밀 즉비제1바라밀 시명제1바라밀(如來說第一波羅蜜 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깨달음으로 가는 지혜의 방편인데 어떤 실체가 있는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이름이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니 이름에 걸리지 마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또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도 같은 의미라고 하였다. ‘진리 혹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위없는 높고 올바른 깨달음은 정해진 바가 없다. 이렇게 정한 바가 없는 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하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라고 역설적으로 금강경은 끊임없이 설하고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것이 올바른 법이라고 할 실체가 없으며, 이것이 올바른 법이라고 하면 더 이상 올바른 법이 아니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어긋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라. 이것이 옳다는 법에도 매이지 마라. 하물며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여도 이를 부처님의 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어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고 다시 강조하였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은 ‘어디 하나에도 매달리지 마라. 어느 것이든지 꿈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그림자와 같아 한 순간에 사라지는 이슬과 번개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마땅히 실상을 보아라.’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꿈같고 실체가 없다. 이 현실이 꿈이고 허상이다.’라고 하면 진짜 곤란하다고 하면서 꿈과 같으므로 마음에 걸림 없이 살아가라는 의미인데 현실 자체를 꿈이고 허상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허황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의를 당부하였다. 현재 편안하고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은 현실을 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고통을 실체로 맛보게 하면 현실과 꿈이 엄연히 다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에 법으로 받아들여 마음이 그것에 매이지 말라는 의미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현재심으로 ‘현재 이 순간 깨어 있어라. 옳다 그르다 생각하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살아가라.’는 뜻이라고 설명하였다.

참선은 정사유 즉, 바르게 생각한다고 정의하였다. ‘여시아문’ 즉,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부처님이 주가 되고 우리는 가르침을 듣는 것이지만 선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되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에는 인과관계가 있다. 모든 일에는 그 원인이 있다. 잘못된 것에는 잘못되게 한 이유가 있고 잘된 것에는 잘되게 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게 된다.’라는 연기법을 말씀하였는데 사성제인 고집멸도도 역시 고의 원인과 결과, 열반으로 가는 원인과 결과인 연기법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마음의 수행의 원리이며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서 그것을 비우려는 노력, 이를 통하여 편안한 세계로 간다고 설명하였다. 이 원리를 제대로 알아서 나는 어떤 욕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철저히 적용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부처님의 진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형식적인 것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하며 법문을 마치고 2부에서는 실참 수행에 들어갔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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