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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쌍수로서의 간화선 수행간화선,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합한 수행이다

세계명상센터 참불선원장이며, 한국참선지도자협회 회장인 각산스님은 2019년 5월 21일(화) 부전선원에서 참선아카데미 지도사 2급과정 수강생들에게 ‘정혜쌍수로서의 간화선’이란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하는 이날 행한 각산스님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참석한 수강생들과 각산스님
법문하는 각산스님과 경청하는 수강생들

먼저 각산스님은 참석지도자협회의 교수사의 덕목 3가지를 도덕성, 전문성(포교현장출신, 혹은 석박사 출신으로 10년 혹은 10 안거이상), 저명성 등이라고 설명하였다.

간화선은 제일 쉬운데도 쉽지 않게 전달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은 알음알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불교란 무엇이냐 하였을 때 석가모니부처님, 사성제 등을 얘기하는 것은 교리적 이야기에 불과하며 불교에는 철저하게 나의 삶을 바꿔주는 입장에서 교리체계에서의 교법과 통찰로서의 관법 즉, 선법이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길동수좌가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스님이 ‘길동아’하고 부르니 길동수좌가 ‘예’하고 대답할 때 스님이 ‘그것이 부처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바로 알면 언하대오로 깨침이고 그것을 모르면 깨침의 길 즉, 내가 예라고 대답하였는데 스님은 부처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뭐지 뭐지하고 물어보는 것을 현재 남방에서 하고 있는 위빠사나(내면관찰법)이고 관심법이라고 하였다. 이 관심법은 이것을 물었기 때문에 수행은 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고요함이 유지되면서 내면으로 마음이 향하는 수행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갈애로 세뇌가 되어 성공이라는 오욕락을 추구하니까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부처는 자유롭게 사는 것이고 나를 떠나서는 천하 만물은 부처자리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 불교라고 하였다. 즉, 부처는 나를 떠나서는 없고 부처는 이름뿐으로 실제는 자유롭게 사는 것이 해탈이고 행복이라고 하며 그것이 내 안에 있다고 알고 받아드리면 고통이 없지만 거부하면 고통이라고 자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불교에는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생멸법이 있고 또 불변하는 것이 성품으로 영원한 것인데 우리는 이 성품을 중생심으로 쓰고 있다고 하며 이 성품은 불생불명, 부증불감하는 것으로 이 본성 자리가 불성이라고 하였다. 인연 따라 흘러가지만 변하지 않은 본바탕을 스스로 알도록 하는 것이라고 수행(관심법)을 설명하며 이것을 애가 스스로 커가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화두는 스스로 보도록 하는 것이인데 이것은 근기가 올라와 있는 사람하고 주고받는 것이라 우리들에게는 다 통용이 되지 않는다고 그 어려움을 얘기하였다.

부처님의 법은 교법과 통찰법인데 교법은 이론을 아무리 배워도 내 것이 되지 않으므로 내 것으로 하기 위하여서는 참선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복잡한 이론보다 명상을 통하여 ‘명상은 하는 것이 아니고 되는 것이구나.’라고 스스로 알도록 한 후 단계적으로 자비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한 번에 탁 보고 아는 것을 직관력, 그러고 한 더 보는 것을 분석력이라고 한다며 참선은 직관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종교란 영어로 릴리젼(religion)을 번역한 것인데 거기에는 원래 신과 인간의 매개체인 사제의 역할로서 다가가는 수사, 신부가 있는데 이런 매개체적인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영어의 릴리젼을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능가경에 나오는 ‘종교’란 말을 일본 학자가 그대로 사용한 것이 문제라며 그렇지만 한번 써버리니 어쩔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설명하였다.

수행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부처님의 성불수행인 안반선(安般禪)과 우리나라의 간행선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또 종교 안에는 원래 신앙은 없지만 현실에서 신앙을 하고 있으니 신앙이 있다고 말하며 어떤 신앙이든지 도덕성이 없으면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종교는 먼저 도덕이 있어야 하는데 불교는 불자 5계가 있지만 이렇게 불살생을 지키는 종교 혹은 신앙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그 다음 종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며 유교에는 신앙은 없지만 철학과 도덕은 있다고 설명하고 그렇지만 이웃종교에는 아예 합리적인 도덕과 철학도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 다음 종교에는 진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진리’란 말을 신앙이나 종교에서 쓰고는 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 진리는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기에 불교만이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며 과학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불교만이 종교(宗敎)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신(神)중의 신이 부처인데도 불구하고 부처는 ‘나를 믿지 마라.’고 얘기하였다고 하고 부처님 법은 연기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부처님이 깨친 진리를 우리는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불교는 간단하게 말하면 사성제라고 하면서 사성제가 없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하였다. 고집멸도의 도 팔정도의 마지막 정정(正定)인데 이것은 ‘올바른 삼매(samadhi)’로 선정이라고 하면서 선정이 있어야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어야 해탈이 있다고 하였다.

선정을 얻은 자가 선정을 말할 수 있으나 선정을 얻지 못하여도 교법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 교법은 미얀마식으로 말로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위빠사나수행만으로는 절대 깨칠 수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위빠사나수행과 사마타수행을 같이 하는 지혜쌍수로 수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것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철학적 근거, 사상적 근거, 경전의 근거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성불수행의 사상적인 근거는 사성제이고 사성제만 알면 깨치게 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고집멸도는 쉽지만 결코 낮은 단계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고통이란 생노병사이며 피할 수 없다는 것, 이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받아들이면 고통이 없고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면 끝난다고 하였다. 고통의 원인은 ‘갈애(渴愛)’로 너무나도 간단명료한데도 이것을 소승이라고 이것을 낮추어 보는 것이 문제이고 조주스님도 똑같이 ‘방하착(放下著) 즉, 내려 놓아라.’고 하였다고 말하며 여기서 ‘착’은 애착, 집착이라고 설명하였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그 순간 고통이 되므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할 것을 주문하고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순간 고통이 된다며 ‘내가 바보다’하는 사람은 고통이 없다고 하였다. 고통이 생기면 내가 이것에 집착, 애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면 그것이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수행 근거는 사염처 즉, 신(身), 수(受), 심(心), 법(法)으로 먼저 신관찰은 신체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여기에는 부정관과 호흡관찰법 즉, 안반선이 있고 수관찰은 느낌 관찰로 남방의 방법이 있다고 하며, 심관찰은 마음 관찰로 화두와 선정이 포함되고, 법 관찰은 ‘법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 사념처를 토대로 하지 않은 수행법은 불교수행법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불교에서 수행 체계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이 쌍수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그 예로 스위치를 켜면 즉각 불이 들어오는데 스위치가 ‘사마타’고 불이 ‘위빠사나’로 비유하면서 이처럼 지와 관은 항상 같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수행 방법은 안반선이라고 하는 아나빠나사티(anapanasati, 호흡명상)와 우리나라의 간화선이 있다고 하였다. 관심법(觀心法)의 ‘관’은 황새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몰입하여 보듯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면서 보는 것이고 간화선(看話禪)의 ‘간’은 더 세밀히 말의 뜻 즉, 마음을 간호하듯이 면밀히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목표는 열반이고 그에 대한 증명은 칠각지라고 설명하였다.

안반선은 심수심법은 각각 4가지 묶음으로 16단계이지만 그것은 2단계만 알면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며 설명에 들어갔다. 제1단계는 ‘위빠사나’로 마음 관찰하는 것이며 염불을 하더라도 마음 관찰을 하여야 하며 이 마음 관찰이 깨침의 기본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올바로 믿으면 절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제2단계는 호흡관찰로 ‘사마타’이며 이것은 멈춤으로 정(定)을 나타내고 호흡방법은 ‘빠리묵하사티(parimukhasati)’라고 하였다. ‘빠리’는 ‘도달하고 순환한다.’라는 의미이고 ‘묵하’는 호흡의 출입구 앞 즉, 인중 앞, 입술 앞, 얼굴 앞 등을 말하므로 숨 쉬는 것만 알면 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호흡 관찰은 숨 쉬는 것을 아는 것이며 입술 앞에서 숨을 쉰다 생각하고 호흡하면 된다고 하였다.

호흡 관찰이 이루어지면 전체 호흡을 보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신의 영역에 들어 온 것이며 호흡 관찰을 제대로 하면 마음이 보인다고 하였다. 호흡이 지속적으로 되면 선정에 들어가 감미로운 호흡, 황홀한 호흡을 체험을 하게 되며 마음을 보려면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호흡 관찰이라고 재삼 강조하였다. 고요히 하면 호흡자체가 황홀하여 전체호흡을 보게 되어 빛이 일어나는 극치인 심월을 맛보게 되며,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진행이 되다 보면 어느 날 시간과 공간이 사라져 버리다가 꽃피는 것이 지혜이고 해탈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마음 관찰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수행인데 그 이유는 마음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길들여진 생활 습관 즉, 업을 버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마음 관찰 수행방법은 간단하다며 걸을 때에는 걷는 줄 알고 걷고, 먹을 때에는 먹는 줄 알고 먹으면 된다고 하였다. 눈을 감고 밥을 먹으면 진짜 오감을 느낀다고도 하였다. 걸을 때 걷는 줄을 알기 어려우니 하나의 방법으로  드론을 띄워 놓고 그 드론에 내가 있어 그 내가 걷는 나를 본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된다고 설명하였다.

마음 관찰하기 위해서는 실참 수행이 필요하다면서 걸을 때 마음 속으로 ‘왼발’, ‘오른발’ 하고 걸으면 되는데 나중 타성이 젖어 자기도 모르게 ‘왼발’, ‘오른발’할 때에는 바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또 빨리 걸을 때 ‘왼발’, ‘오른발’하면 집중이 되지 않으므로 이때는 걷는다는 것만 알고 걸으라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마음 관찰을 하면 자신의 동작을 알게 되므로 조심하게 된다고 하였다.

동작 하나하나를 아는 것이 마음 챙김(sati)은 정념(正念)으로 이것은 불선업을 제외하고 선업만 저장시켜 준다면서 이 사티에는 ‘마음 챙김(mindfulness)’, ‘알아차림(awareness)’, ‘주의집중(attention)’, ‘저장(remember)’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여러분의 의지처는 명상이니 항상 호흡 관찰을 하며 보고 다니기를 재삼 강조하였다.

그런데 현재 행해지는 이런 종류의 강의는 일종의 홍보각축장이 되었으니 수강생 여러분들은 자기에게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여 수행하라고 하였다. 일단 간화선 쪽으로 말하자면 ‘말하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고?’는 초기경전에서 행주좌와할 때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라’와 똑같다고 설명하고 이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 경허스님의 ‘앉고, 서고, 보고, 듣고, 말할 때 일체처 일체시에 즉, 언제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소소영영(昭昭靈靈)이 지각하는 이놈이 뭐고?’라고 하였다. 알아차림을 유지하게 되면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이 생기고 보는 능력이 생기면 보인 것만 보게 되므로, 보는 그대로 보게 되어서 이때 통찰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것을 소소영영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대념처경에는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라,’와 같다고 설명하였다.

시끄러울 때 시끄러운 소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시끄럽다고 싫어하는 마음이 문제라며 이것만 발견하면 수행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먼저 안반선에서는 봄에 대한 앎이 어떤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본다, 본다, 본다, 봄, 봄, 봄인데 그 아는 것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여 멈추지 못하므로 숨을 쉬고 있냐?’하고 물어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야바라밀을 얻어야 보시를 하여도 그 보시가 공덕으로 남는 것이지 성을 한 번 내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고 그렇기에 그런 지혜를 얻으려고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감각기능의 토대가 6근이며 이것으로 시작'이라고 설명하며 '나라고 여기는 놈이 오온인데 이것은 무아이며 오온은 개체적으로 그냥 존재하지만 인연 따라 있을 뿐이며 공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또 이 오온을 분석하여 보면 감각적 기능인 6근을 알게 된다고 하였고 '6근이 대상 즉, 6경계를 만나면 6식이 나온다'고 말하며 우리는 생각이라고 하는 의(意) 작동에 빠져 있었으나 지금은 수행으로 그 생각을 내가 알게 되는데 그 생각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설명하였다.

안반수행에서 숨 쉬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삼매라고 말하며, 이렇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생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있구나 하고 받아드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도 하였다. 이 생각은 달아나려고 하는 송아지로 볼 수 있는데 이 송아지를 붙들어 매려면 밧줄과 말뚝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밧줄이 ‘알아차림’이고 말뚝이 호흡 관찰이고 간화선이라고 비유하며, 이 생각, 망상을 알아차리면 바로 지혜라고 하였다.,

느낌, 감정은 일어났다 사라지므로 나의 것이 아니므로 수행하면서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것은 호흡 훈련을 하면 알게 되는데 여기서 그 아는 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화두수행이라고 하였다. ‘한나라의 개는 흙덩이를 쫓아가고, 사자는 사람을 향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개처럼 이익에만 쫓아가는 중생심을 갖지 말고 내가 부처란 불성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선이라고 강조하였다.

일본의 어떤 스님이 지옥과 천당이 무엇인지를 묻는 어떤 대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나게 하여 지옥을, 또 절을 하게 하여 천당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였고 또 다른 예로 조주스님이 지옥을 묻는 스님에게 뺨을 때려 성나게 함으로써 지옥을 설명하였다고 하면서 바로 선은 물어보는 사람에게 직접 체험하게 하고 또 거기에 맞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화두는 하는 대로 그대로 되는 의심이어야 하지 몰라서 그냥 궁금증 때문에 하는 의심은 아니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뿐인데 그런 마음으로 하는 의심이고 그와 같이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사람에게 딱 맞게 주어졌을 때 그 생각밖에 없게 하는 것이 화두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예로 아르키메데스가 왕으로부터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판별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몰입하여 발견하듯이 화두도 뭔가를 물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몰입이 되고 몰입이 되니까 삼매가 이루어지고 삼매가 익어지면 저절로 터진다고 하였다. 찾으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찾는 것이지 모르겠다고 하는 순간 찾는 마음이 사라진다며 그래서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 하다 보면 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화두의 의심은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금가지 언급한 것을 간화선으로 통합하여 제시하겠다며 먼저 손가락을 흔드는 놈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아주 낮은 단계라고 하였다. 그래서 ‘숨 쉬는 것을 아는 이 놈은 무엇인가?, 이 숨 쉬는 것을 지켜보는 놈이 뭐고? 또는 나라고 여기고 있는 이놈은 누구인가?, 무아라고 하는데 오온으로 존재하는데 이놈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이것을 하나로 묶는 화두를 발견하였다고 소개하였다.

그것은 먼저 ‘손가락을 흔드는 놈은 뭔가?’하는 것은 '밥 먹고 잠자고 하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은 무엇인가?'와 같이 대념처경에 나오는 형태와 똑같은 얘기라고 하였다. 구지(俱脂)선사의 손가락을 응용한 그 화두는 손가락을 세웠다가 치우고 ‘이것은 손가락이라고 말해도 틀리고 손가락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다. 이것은 무엇인가 일러봐라.’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왜냐? 손가락이라고 하면 남의 집 종살이이고 아니라고 하면 이단자다.’라고 하면서 그것은 손가락이라고 하면 남이 붙여준 대로 쫓아가는 것이니 '종살이'이고 아니라고 하면 세속에 규정된 것을 벗어나니 '이단자'라고 설명하였다. ‘생각을 하여도 틀리고 아니 해도 틀리고 또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하면 더 틀린다, 아르키메데스가 몰입한 것처럼 이것을 믿고 계속 의심하라.’고 말하였다.

간화선이라고 명칭을 붙인 분은 대혜종고(大慧宗杲)인데 임제스님의 정신인 살부살조(殺父殺祖)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있었기에 스승 원오극근(圜悟克勤)의 벽암록을 불태워 버렸는데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스승의 법을 이었다고 말하였고 또 방금 제시한 화두에는 근거가 필요하다면서 대혜종고, 원오극근, 오조법연의 스님의 화두를 근거로 설명하였다.

즉, 원오극근스님은 ‘비 소리가 들리느냐? 일러봐라.’고 하였는데 ‘비 소리라고 하면 사물을 쫓아가서 너를 잃어버린다. 비 소리가 아니라면 뭐라고 하여야 하나 답이 나오지 않으니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의심이며 화두’라고 하였다.

원오극근스님의 스승인 오조법연스님은 주먹을 들고 ‘주먹이 무엇인지 일러보라. 주먹이라고 말하면 생각이 없는 자요, 말하지 않으면 마주보고서 속인다. 뭐라 하여야 하나?’라고 하였다고 말하고 또 대혜종고스님은 ‘죽비란 무엇인가? 일러보라. 죽비라고 말하면 그릇되었고, 말하지 않으면 모순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뭐라고 해야 하나.’라고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구지선사의 손가락 화두를 응용한 ‘손가락이라 해도 틀리고 아니라고 해도 틀린다. 이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제시하고 ‘부처의 본바탕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현실의 세계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인가?’ 참구하라면서 법문을 마쳤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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