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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선은 염불선으로무념과 무아에 대한 이해가 밑받침이 되어야

경북 영주의 대승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원인선사는 2019년 4월 23일(화)과 24일(수) 부전선원에서 참선아카데미 지도사 2급과정 수강생들에게 ‘현대인의 선’이란 주제로 법문을 하였다. 이하는 24일(수)에 행한 원인선사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수강생들과 함께 한 원인스님
수강생들과 함께 한 원인스님

원인스님은 먼저 ‘마음 불순물을 무엇으로 제거할까요?’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이 마음 다스림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선이라고 하면서 말문을 열고, 먼저 ‘그대 선(禪)을 알고자 하는가? 있는 그대로 본질을 보라. 그대 마음을 보고자 하는가? 보는 그대로 마음 아님이 없다. 그대 부처를 만나고자 하는가? 선이 곧 법이요 마음이 곧 부처다. 상대를 바로 보면 그것이 절대요, 절대를 잘못 보면 상대가 된다. 이 법은 본래부터 평등하지만 보는 자에 따라 차별이 일어난다. 오늘 여기에서 선의 법회가 열리니 보고 듣는 그대로 근본이 되고 이사(理事)에 걸림 없는 선의 세계가 한자리에서 크게 펼쳐지는구나.’란 ‘선과 마음과 부처’란 선시를 읊으면서 법문을 시작하였다.

불교의 매력은 깨달음에 있다고 하면서 부처님은 샛별을 보는 순간 그것을 통하여 마음을 보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혹의 구름으로 꽉차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우리는 물질세계를 살아가면서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지 한 번쯤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우리는 몸을 위해서 가지가지 노력하지만 종래에는 부질없는 업과 습관만 남으므로 이 대신에 ‘내가 내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고 좋은 일이다.’라고 강조하였다. 또 사람들은 밖으로 물질을 추구하는데 인생 낭비하고 있는데 절반이라도 아니면 한 시간이라도 자신을 위하여 투자한다면 물질을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좋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선은 내가 내 마음을 찾아가는데 적당한 수행이지만 선 어떻게 실천하는가? 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선의 본질은 마음 닦음이고 마음을 닦으면 근본에 계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선시불심(禪是佛心) 즉, 선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은 근본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이 있으므로 이 선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이해하여야 제대로 닦을 수가 있다고 하였고 강조하였다.

먼저 선은 근본이 중요인데 그것은 무념(無念)이라고 하면서 이 무념은 무념지념(無念之念)으로 망념이 끊어진 바탕에서 일체를 수용하는 것, 일체 의혹이 끊어진 자리, 중도실상에 입각하여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자리. 이것이 무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고 무념의 바탕에서 선에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무념이 없이 나도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겠다고 한다면 이런 야망에 찬 마음, 밖으로 추구하는 마음으로 도를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수행에서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나’이므로 자아의식에 사로잡힌 ‘나’를 버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장애는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불교는 처음부터 무아(無我)를 가르치는데 이 무아에 계합되지 않으면 그 수행은 정도로 갈 수 없다고 하였고 또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밖에는 없다고 역설하였다.

무아가 될 때 무념이 되고 무아가 되지 않으면 무념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이렇게 이해를 하고 수행하면 된다고 하였다. 무아에 계합이 되면 부처이며 이 계합은 수행은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이론적으로 이해하였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라도 반드시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이해를 하는 것과 이해를 못하는 것과는 그 차이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예로 천리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간다면 처음에는 차이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닦으면 닦을수록 그 차이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며 초발심 자경문의 글귀 ‘지혜가 없는 이는 동쪽으로 가겠다면서 서쪽으로 나아감과 같다.- 욕왕동방이향서행(欲往東方而向西行)-’를 예로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반대로 가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행복의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불행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것은 무아에 바탕을 두고 시작하여야 하지만 ‘나’에 바탕을 두고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불교 이외에는 ‘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전부 반대로 가고 있다면서 그 예로 ‘나’가 설정이 되면 ‘남’이 설정이 되어 ‘나’와 ‘남’, ‘선’과 ‘악’, ‘거(去)’와 ‘래(來)’, ‘남’과 ‘녀’, ‘음’과 ‘양’ 이렇게 밖으로 향하면 두 가지가 되어 세상은 이원론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헤겔의 변증법도 상대적인 논법인데 정(正)에 대하여 반(反), 이 반에 대하여 합(合), 이 합에 대하여 다시 정(正)으로 끝도 없는 윤회를 하게 된다며 마음밖에 경계를 구하면 구할수록 자신과 점점 멀어지고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면 그 마음은 점점 불행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다.

불법을 만나면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상대적인 행복 즉, 불행에 반대되는 행복, 행복에 반대되는 불행이 아니라 행복과 불행 둘 다 버려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이원론적 방식에서는 진정한 행복은 얻을 수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행복의 정의 불행의 정의의 무엇인가 그것은 ‘나’란 착각에 빠져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독약 자체가 독약은 아니고 인간이 거기에 의미 부여할 뿐이지 만물은 좋고 나쁨은 없고 만물은 그대로 실상이고 그대로 참모습이니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도에 들어가는 첫걸음이라고 정의하였다.

마음, 도, 부처 등은 차별이 없으므로 우리는 이원론을 초월한 절대경지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되든지 아니 되든지 혹은 체험을 하든지 못하든지 이해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 최소한 세상으로부터 속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잘못된 견해의 결과는 괴로움일 따름이지만 수행이란 고통과 즐거움을 떠난 영원한 즐거움, 행복을 구하자는 뜻이 있다고 하면서 영원한 행복은 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밖으로 쫓아다니므로 진정한 행복을 구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내면에서 영원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선수행은 고귀한 것이며 불교에만 있는 고등의 정신문화라고 하면서 그러면 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리고 선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의 이해의 첫걸음이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되고 또 그 전제는 무념이 된다고 하였다. 무념(無念)은 망념이 없음을 말하며 현상에 미혹하지 않음을 말한다며 욕계, 색계, 무색계 등의 삼계는 탐진치 삼독으로 인하여 만들어져 있는데 삼계에서 해탈이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 해탈할 수 있는 인연을 맺어야 하는데 그 인연은 선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누구한테도 침해받지 않은 마음자리를 찾아야 하며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어 절대적인 행복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절대에 대한 착각이 있다고 말하고 그것은 이원론의 세계에서 상대적 세계를 초월하면 절대적인 세계가 있는데 ‘이것이 불법이다.’ 라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절대에 대한 착각이라면서 상대에 대하여 상정되고 개념화 된 절대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고 하였다. 불자들은 허무맹랭한 논리에 빠져 사고 있지 않음에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상대는 이원적인 착각에 빠져 보는 것이어서 상대는 허상이고 망상이며 망념이고 미혹된 어리석음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절대는 바로 보고 듣는 이 경계를 바로 부처로 돌이켜 보는 것이 절대이므로 지금 이 모든 현상은 부처가 아님이 없어서 모든 것을 부처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불교의 중도, 실상, 선, 열반, 깨달음 등은 상대적 개념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임을 꼭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불자들이 절대 상대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면 옆길로 가지 않아 다소 수행이 힘들더라도 엉뚱하게 세월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힘주었다.

8정도에서 정견을 중요시되는데 정견이 되면 나머지 일곱 가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으므로 정견, 바른 견해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행으로 식이 맑아지면 식광이 생기고 이에 따라 신통력에 빠지게 되어 정견이 없으면 자칭 부처라고 착각하여 가기가지 업을 짓게 되어 구제불능하게 된다면서 정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수행도 중요하지만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최소한 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지혜가 없으면 착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나 착하게 산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경계하였다.

또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작(無作), 무용(無用), 무심(無心), 무아(無我), 무여(無餘), 무문(無門), 무명(無名) 등 10가지는 무념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이름이라고 하고 무념의 개념을 이해하기는 비록 어렵지만 이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하면 빨리 들어갈 수 있다고 재삼 강조 강하였다.

‘내가 부처가 되어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을 다 제도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리라.’란 말은 좋은 말 같으나 벌써 ‘나’가 들어 있는데 이것은 제바달다의 얘기와 같은 같다고 하면서, ‘나’라는 것을 두면 처음부터 수행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부처는 모든 망념이 쉬고 구하려는 마음을 다 끊어지고 선과 악을 초월하고 삿된 마음을 조복을 받을 때 모든 착각이 없어지는데서 저절로 오는 것이고 또 마음이 밝아지면 저절로 부처가 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음이 맑아지면 청정무구한 마음이 갖게 되면 저절로 선정삼매에 들어가서 청정한 계가 확립되는데 선정에서 지혜가 나오는데 이 지혜는 ‘나’라는 아상이 무너지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탐진치 중 어리석음을 돌이켜 지혜를 이루는 것이 대원경지라고 설명하였다. 또 능엄경의 ‘인계생정(因戒生定) 인정발혜(因定發慧) 즉, 지계로 인하여 선정이 생기고 선정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일어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승가는 첫 단계부터 어긋나 마구니들이 극성하고 있다고 현금의 상태를 개탄하며 계율을 지키지 않은 수행자들에 대하여 일침을 놓았다.

고려말 나옹대사는 공민왕을 지도한 왕사이며 석가의 후신이라 칭송을 받는 도인이었지만 승가의 타락상을 막지 못하였는데 승가 타락은 그 흐름이 도도한 물결과 같아 혼자의 힘으로 막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고려말의 승가도 오늘날 승가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며 사실 현재의 타종교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불교보다 더 타락되어 있다고 진단하였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종교 무용론이 나올 것으로 예견하였다. 개인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도덕성이 없는 종교는 자동적으로 퇴출된다고 하면서 현재는 무종교인 60%인데 그 중 압도적인 사람들이 현재의 종교 중 친근한 종교를 불교로 보고 있다고 소개하고 그것은 스님들이 존경을 못 받으니 무종교인이 된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오늘날 종교는 위기인데 이것으로 불자들에게 피해가 있을 것이므로 불자들은 선을 통하여 불교의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이 시대에서는 선으로써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가야하는 것이 불자들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강조하였다.

선은 보배이지만 선을 실천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그 중 좌선은 기본이라고 하였다. 또 수행방법에는 절대긍정의 염불선, 절대부정의 화두선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놈이 뭐고?’하고 의심하면 화두선이지만 염불에서는 속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는 상태를 또록또록 지켜보는 것, 염불하는 그놈을 부처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망상을 망상으로 다스려 즉, 생각하고 생각하여 망념을 사라지게 하여 무념의 상태 즉, 마음이 부처라는 자성미타의 도리에 들어가는 것이며 염불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화두선에서 의정을 타파하였는데도 화두를 들고 있으면 무의미한 것이므로 보임(保任) 즉, 깨달음의 경계를 그대로 호지하여 마음을 진여로 관하는데 그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관하는 것으로 이사(理事)가 긍정이 되고 깨달음을 체험으로 승화되는 것인데 반하여 염불수행은 처음부터 보임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염불하는 그 놈을 부처로 반조하는 것이며 이를 ‘생각한다.’ ‘관하다’, ‘명상한다.’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위빠사나에서는 주제가 없이 관조(觀照) 즉,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반조(返照) 즉, 돌이켜서 자기를 비추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관조는 주객이 나누어지는 것이고 반조는 주객이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관조를 하면 주객이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공부가 깊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조사선에서 반조를 하니까 예를 들어 염불의 경우 반문문자성(返聞聞自性), 즉 ‘염불하는 그 놈을 돌이켜서 듣는다.’ 또는 ‘듣는 놈을 돌이켜서 자성을 듣는다.’ 혹은 ‘아미타불을 부르되 부르는 그 놈을 돌이켜서 그 성품을 듣는다.’로 돌이켜서 관하면 쉽게 본래면목에 계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에 들어가 위해서는 참회가 우선이 되어야 하며, 염불을 할 때에는 무념과 무아로 수행을 1시간만으로도 한다면 그 효과가 엄청나게 난다고 말하였다.

실참수행에서는 먼저 좌선법을 설명하였는데 결가부좌를 하면 허리가 제대로 펴져 10시간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또 오른쪽은 움직임(動)을 의미하고 왼쪽은 정(靜)을 나타내므로 움직임을 정으로 눌려야만 좌우 균형이 된다고 설명하고 눈을 감지 말고 반개하여 1~ 1.5m 전방을 봐야 한다고 하였다. 결가부좌가 어려우면 반가부좌도 좋지만 처음 시작은 왼발이 위로 하여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화두선일 경우 처음은 ‘어째서 조주스님은 무라고 하였는가.’란 전제를 먼저 하고 다음에는 ‘무’란 단제를 의심하여 10분 이상 잡념이 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고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독심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염불선의 경우 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인데 ‘아미타불’ 4자를 끊임없이 적당한 속도로 반복 하는데 처음에는 소리내어 ‘아미타불’하고 그 다음은 속으로 암송하면서 그때 그 암송하는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고 하였다. 소리를 내는 그 놈이 내 성품자리라고 확인하고 소리를 내는 그놈을 똑똑하게 지켜보는 것인데 이것을 '염불 명상' 혹은 '염불 위빠사나'라고 한다고 설명하였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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